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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ut Act] '나쁜 페미니스트'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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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
댓글 0건 조회 7,770회 작성일 16-06-29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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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미니스트의 오해와 낙인
책을 읽으면서 ‘페미니스트라는 낙인’의 조주은 선생님 글이 떠올랐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라는 낙인’으로 검색을 하니  다음과 같은 글이 소개되었다.

다음포털에서 ‘페미니스트’를 검색하면 첫 번째 글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된다.
 ① 여성의 자유와 권리의 확대,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사람.
 ② 여성을 숭배하는 사람.
이러한 정의가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에 대한 오해를 키운다면서 한국여연은 다음의 내용으로 국립국어원에서 수정을 요청한다.
‘페미니즘은 계급, 인종, 종족, 능력, 성적 지향, 지리적 위치, 국적 혹은 다른 형태의 사회적 배제와 더불어,
생물학적 성과 사회문화적 성별(젠더)로 인해 발생하는 모든 형태의 차별을 없애기 위한 다양한 이론과 정치적 의제’ 이며
‘페미니스트는 이러한 페미니즘을 지지하고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설명과 함께.

페미니스트에 대한 우리 사회의 편견이 반영된 정의가 유통되고 수용되는 사회에서,
특히 페미니즘을 남성혐오로 읽는 분위기에서 페미니스트를 자임하는 하는 것은
일종의 ‘커밍아웃’이며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는 이가 적고, ‘페미니스트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기 위해
평등주의자, 인권옹호자, 휴머니트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저자는 페미니즘을 부정하고 페미니스트라 불리는 걸 거부하면서 페미니즘에서 잉태되는 모든 발전과 변화를 지지한다고 말할 때
화가 난다고 말하면서 페미니즘의 오해를 벗어나서 이 페미니스트란 단어와 거리를 두지 않는 사회에서 살기를 희망한다고 말한다.

2. 우리 문화에 깊이 드리워진 여성혐오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하에 흔히 불리우는 노래가사에 드러난 여성혐오가 자리잡고, 우리는 흥얼거린다.
성폭력을 남자다움의 실천으로 보거나, 성폭력 피해자 보다는 가해자의 미래를 걱정하는 신문기사를 폭로하면서
우리는 모든 종류의 성폭력에 지나치게 허용적인 ‘강간문화’에 물들어 있다고 말하고 오랫동안 사용해 왔던 ‘강간문화’가
성폭력에 빠진 문화에서 발생한 구체적인 문제를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했고
‘강간범문화’라고 바꾸어 쓰길 제안하기도 한다.
(성매매 반대를 성구매 반대로 말하고, 성매매문제해결의 주체는 남성에게 있다는 구호가 생각났다.)

3. 아이티계 이민자, 중산층 흑인여성으로서 느끼는 사회적 배제
흑인 노예문제를 다루는 문화적 방식(영화와 드라마)의 한계를 문제제기 하면서
흑인들은 당사자로서 창조적인 방식으로 흑인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제기한다.
 더불어, 여성들의 재생산의 자유(낙태와 출산의 결정권)에 대한 정치권의 행태와 이를 다루고 접근하는 언론들에 대해
문제제기하면서 여성들이 왜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를 집요하게 이야기 한다.
수 많은 나라들에서 아기를 낳지 않은 남자들과 정치가들이 낙태의 범위와 방법, 임신 출산의 자유 등
여성의 생식권을 통제하고 있지만 남자들에게는 몸의 권리에 대한 제약이 있었는가 묻는다.
더불어 권력을 누리는 위치에는 여성들이 진입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하면서
여성은 아직 ‘인간’으로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청소년기 성폭력문제를 담담히 서술하면서도 자신이 아이티계 이민자로, 흑인 여성으로 가졌던
차별과 배제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도 안정적 중산층 가정에서 부모님의 경제적, 정서적 지원 아래 성장해 오면서
책을 여러 권 낸 작가, 교수, 경제적 안정성 등 스스로 가진 특권 역시 직시한다.

4. 나쁜 페미니스트 되기
주디스 버틀러의 ‘수행적 행위와 젠더 정체성’에서 ‘자신의 젠더를 잘못 수행하면 직간접적으로 그에 따른 대가를 받게 되고
사회가 입력한 대로 젠더를 수행했을 때 옳은 일을 했다는 확신을 얻게 된다.
마치 젠더 정체성의 본질이라는 것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를 인용하면서 페미니즘을 접하는 사람들 사이에도
본질적인 여성이 되는 옳은 방법이 있다는 개념이 넓게 퍼져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버틀러 이론이 페미니즘에도 적용되면 페미니즘 안에도 옳고 그름이 있고, 페미니즘을 잘못 시행하면 나쁜 결과가 따른다면서
근본주의 페미니즘에 대해 경계한다.
근본주의 페미니즘의 가장 큰 문제는 인간들의 복잡한 경험이나 개개인의 특성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고 본다.
즉, 우리 사회의 페미니즘이 누구에 의해서인지 모르지만 매우 높은 기준을 제시되거나
다양한 의견을 수용되지 않는 상황이 펼쳐지면서 페미니즘과 거리두기가 진행되고 현상에 대해 이의제기한다.
그러면서 자신은 완벽한 페미니스트일 수 없지만 페미니스트여야 하고,
 따라서 페미니스트를 포기하기 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나쁜’은 도덕적으로 잘못된 아니라 ‘완벽하지 않은, 부족’의 의미이다.

5. 나는 페미니스트인가?
페미니스트라는 말이 어느 때는 해방감을 주고, 어느 때는 나를 경직시키는 것 같다는 느낌이 있었다.
정치적 올바름까지 수행하지 않더라도 페미니스트로의 세상살이는 녹녹하지 않다.
세상에 즐거운 일도 많지만 페미니스트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눈감고 가기엔 딴지거리도 많다.
 그래서 해방감은 일시적이고 분노와 답답함이 많았다.
그렇지만 페미니즘의 대의적 지향에 동의한다면 발현하고 실천, 행동하는 방식이나 내용은 각기 다양하게 펼칠 수 있다는
n개의 페미니즘, n개의 페미니스트를 생각하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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