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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 / 윤대녕 / 중앙일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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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
댓글 0건 조회 7,304회 작성일 14-12-02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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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여성생활문화공간 비비 <A href="http://www.yonggamhan.org/liguard_bbs/www.spacebb.co.kr">www.spacebb.co.kr</A>)
책상 정리를 했다. 한쪽으로 높이 쌓여있는 책을 치웠다. 정리했다. 배추 솎듯이 솎아냈다. 골라냈다. 반응이 느린 나는 책을 읽고 나서도 영화를 보고 나서도 뜸 들일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나서 바로 말하지 못하고, 책을 읽고 나서 바로 쓰지 못한다. 머릿속에 이야기를 쌓아놓듯이 책상 위에 책을 쌓아놓는다. 뭔가 쓸 수 있는 타이밍을 기다리며, 뭔가 쓸 수 있는 연결고리를 낚아챌 순간을 기다리며 시간을 내어준다. 가거라. 시간아. 시간이 너무 많이 갔다. 그냥 보내기에는 아쉬운, 그래도 최근에 읽은 책 몇 권을 남겨놓고 책상을 치웠다. 스윽 한 줄기 문장이 지나갔다. 인생에 타이밍이 중요하다 했던가. 적절한 타이밍. 하지만 타이밍 따위 안 올지 모른다. 기다림은 어느 임계를 넘기는 순간, 그때그때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시간은 내가 내어줬지만 지나간 시간은 저 혼자 과거가 되었다. 미래가 될 수 없는 과거. 나에게 이 책을 읽을 적절한 타이밍이란 것이 있었을까.
소설읽기 모임 오전반에서 올 해 마지막으로 읽기로 한 작가는 윤대녕이다. 요즘은 누구 읽어? 물어보면 윤대녕, 말해놓고 구시대의 유물이 갑자기 떠오른다. 김영하, 구효서, 윤대녕을 묶어서 읽기로 했을 때 나름 최근에 신간을 낸 작가들이라는 명목을 염두에 두었다. 그런데 그들을 지금 여기에서 다시 읽으면서 유독 윤대녕만이 먼 나라의 사람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에게 내어준 시간이 많이 지나갔다. 그는 나에게 그때 그사람. 비가 오면 생각나는.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에 97년도 사인이 되어 있었다. 책에 줄이 너무 선명하게 그어져 있는 부분이 많았고, 모르는 단어는 국어사전을 찾아 옆에 표기해 둔 곳이 여러 군데다. 뭔가 떠오르는 것들을 메모해 두었고 지금 읽어보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간극만이 심하게 느껴졌다. 누가 볼까 부끄러울 만큼. 95년 1월 1일에 나온 이 책은 절판되었고 2008년에 출판사를 바꿔서 개정판이 나왔다. 개정판에 붙은 작가의 말을 옮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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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삼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 독자들이 이 소설을 어떻게 읽을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는다. 첫 장편소설만 아니었다면 절판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할 생각도 있었다. 그것이 이 소설의 운명일 수 있는 것이다. 이왕 복간본을 내놨으니 독자들이 조금은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 책을 처음 내던 1995년 당시를 돌아보니, 돌연 아찔한 현기증이 몰려온다. 그때 나는 몹시 불안한 심정으로 삐걱이는 다리를 건너고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 다리를 건너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듯 매순간 아슬아슬하게 글쓰기를 지속해온 게 정녕 사실이다. 부디 여한이 남지 않도록, 보다 온 힘을 다해 내가 살아온 방식과 운명을 고수하고 싶다. 다른 도리가 없음을 이제는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윤대녕,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 문학동네 2008, 작가의 말]
나는 이 책을 십칠 년이 지나서 다시 읽는다. 이상하게 슬픔이 밀려온다. 아련함이 몰려온다. 책의 내용은 그냥 그렇다. 윤대녕만 보인다. 그때 나는 몹시 순수했나. 시와 소설을 읽기 시작할 즈음, 영화를 보기 시작할 즈음 그것이 내 삶이었다. 읽고 보는 것. 다른 것은 잘 보이지 않는, 다른 해석은 잘 되지 않는. 그런데 20대 후반에 읽었던 윤대녕을 40대 초반에 다시 읽는다는 것은 시간의 낙차를 몸소 체험하게 했다. 은희경, 신경숙, 전경린을 다시 읽어도 이런 느낌일까. 그 책을 읽을 적절한 타이밍이란 것이 있을까. 20대 후반, 소설을 문학으로만 읽고 문학적으로만 해석하고 싶었다면 40대 초반, 나는 이미 그때의 나가 아니다, 라는 자각만 남았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슬프다. 그의 소설이 너무 문학적이어서, 그래 그렇게 말하자. 나는 슬프니까. 보이지 않는 것, 생략한 것, 건너뛴 것, 말하지 않은 것, 이미지화 된 것, 비유한 것, 묘사한 것, 연결한 것, 상징한 것, 나타낸 것, 남은 것, 흔들린 것, 흘러간 것, 찾아낸 것, 기다린 것, 사라진 것들의 층위는 어디일까. 그의 말처럼 아무것도 없는 곳 어디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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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제 우리는 옛날 영화를 보러 가자. 
그의 많은 소설에서 그랬듯이, 여지없이 실체하지 않을 것 같은 묘령의 여인이 나온다. 이쪽과 저쪽 사이에서 그 여인은 한 남자의 삶을 혼란과 혼돈으로 흔들어댄다. 이번에는 기억의 퍼즐을 맞추기 위해 세 명의 여인이 나온다. 여인은 신호를 보내고, 사인을 주고, 의미를 풀어야 하는 숙제를 주는 메신저 역할을 한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넘어가는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과정은 그래서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아내와도 별거한 채 무의미한 일상을 보내는 서른셋의 주인공은 레코드점의 여주인과 술집 산수유에서 얼핏 본 여자에게서 기시감(旣示感) 증세를 일으킨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옛날 친구 E로부터 옛날을 기억해내라는 메시지를 받게 된다. 그는 혼자서 옛날 영화 [태양은 가득히]를 보면서 고등학교 때 여자애와 함께 그 영화를 보았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해낸다. 조금씩 기억의 파편들이 드러나고, 마침내 고등학교 1학년 시절 만났던 유진이라는 여자와 친구 희배, 세 사람이 맺었던 기이한 관계가 드러난다. 
“나는 내 몸 속에서 울리는 정오의 사이렌 소리를 듣고 있었어.”
“정오의 사이렌 소리요?”
“그래, 시간의 문이 열리는 신호지.”
그녀와 나는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마셨다.
“……”
나는 나도 생각지 않았던 말을 줄줄이 늘어놓고 있었다. 왜, 어디서 그런 말들이 튀어나오는지 나도 실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무엇에 씌인 듯 계속해서 이런 말을 마구 뇌까리고 있었다.
“시간은 직선으로 오는 게 아나. 눈에 보이진 않지만 둥글게 휘어져서 빛이 시작된 점을 향해 회전하고 있어. 시간은 곡선운동을 하고 있단 말야. 둥그렇게 말리면서 원을 만드는 거야. 그러니까 시간의 흐름은 시작과 끝이 이어져 있다는 것, 그래서 무한히 되풀이되고 있다는 얘기지. 아까 난 그 시작과 끝이 맞물리는 지점을 통과하고 있었던 거야. 굉장한 속도로 말이지.” [윤대녕,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 중앙일보사 1995, 138p]
미완의 과거, 해결되지 않은 과거, 풀이되지 않는 과거, 멈춰 있는 과거, 설명되지 않는 과거, 조각난 과거, 움직여지지 않는 과거, 부서진 과거, 사라진 과거, 도난당한 과거, 연속성이 없는 과거, 그 과거를 각자 다른 시간으로 지나온 어린 시절의 세 사람. 그들에게는 정녕 무엇이 필요했을까. 또한 작가에게는 대체 무엇이 필요했을까.
 
“상상력으로 사고하란 건 뭐지?”
“난 가끔 내 몸의 질량을 잃어간다고 생각될 때가 있어. 그러니까 사건의 지평선에 와 있다고 생각될 때가 있단 말이야. 그건 그럴 때 하는 말이야. 상상력으로 사고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나도 모르는 장소로 쑥 빠져드는 거야.”
“그럼 질량을 잃어간다는 건 뭐지?”
“빛의 속도와 내 의식의 속도가 동일한 지점을 향해 육박해 간단 거지. 요컨대 네가 인식하고 있는 시간과 내가 인식하고 있는 시간은 서로 달라. 재미있는 영화를 볼 때와 지루한 책을 읽고 있을 때처럼 말이지. 다시 말해 하나의 시간에 작용하는 네 질량과 내 질량은 서로 다르다는 거야. 나는 절대 시간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릴 때가 많아. 내 의식 속에서 시간이 상대적으로 작용하고 있단 말이야.”
“……나도 그럴 때가 있는 것 같아. 문득문득 내가 전혀 엉뚱한 공간을 밟고 있다라고 느낄 때가 있어. 맞아, 그럴 때면 나도 상상력으로 그 상태를 극복하곤 해. 내가 현실적인 공간에 있다는 상상과 주문을 외운다는 거야. 그럼 낯설었던 공간이 현실의 공간으로 변하는 거지.”
“그게 바로 상대적 사고라는 걸 거야.”
“왜 사람만이 시간을 상대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걸까.” 
[윤대녕,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 중앙일보사 1995, 197p]
그들에게는 잃어버린 절대시간으로 돌아갈, 과거를 회복할, 현실의 세계로 돌아올 공간이 필요했고, 그에게는 전 소설을 통해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매순간 아슬아슬하게 글쓰기를 지속해왔다는 작가의 말이 그의 삶 전체를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고백한다. 계획에 있었지만 우연히 찾아온 십칠 년 전의 윤대녕이라는 공간. 아름다웠지만 슬픈, 순수했지만 비현실적인, 조우했지만 영원하지 않은. 내가 소설을 읽는 것은 매순간 흔들리는 나를 현실의 공간, 지금 여기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다. 당신은 지금 어디쯤 있는가?
오늘 난 한 편의 옛날 영화를 보러 왔네. 영화가 끝나면 나는 내 공간으로 돌아갈 작정이네. 현실의 공간으로 말이지. 여기가 바로 내 벌레 구멍일세. 과거를 회복한 공간 말일세. [윤대녕, 『옛날 영화를 보러갔다』 중앙일보사 1995, 267p]
 
2014. 11. 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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