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 글쓰기강좌를 마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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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align="right">봄봄(여성생활문화공간 비비)</p>
1.
글쓰기강좌가 끝났다. 시간이 덕이다. 꾸역꾸역 글쓰기강좌를 끝냈다. 한 주마다 글을 써오는 친구들의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과 동시에 내 몸은 이상 징후 반응을 보였다. 한 주는 코가 피를 쏟아냈다. 길게. 멈추지 않고. 폭포처럼. 어렸을 적 코피를 심하게 쏟은 나는 무서웠다. 다음 주는 눈이 힘을 상실했다. 바위를 눈자위에 올려놓은 듯 무겁게 짓눌렸다. 아침이면 눈가가 부옇다. 꿈에서 일어났던 감정의 잔재들이 흔적을 남겼다. 한쪽 시력이 거의 없는 나는 걱정되었다. 다음 주는 귀에 철사를 넣고 헤집었다. 전기드릴처럼 부르르 떨렸다. 사오정 소리를 자주 듣는 나는 괴로웠다. 다음 주는 가슴이 통증을 호소했다. 심장이 왼쪽인가, 오른쪽인가. 아. 언제 끝나나. 종강의 날, 한 친구는 소감으로 일단 끝나서 너무 좋다고 했다. 나도 그렇다고 했다. 재밌는 것은 이 모든 증상이 몸의 왼쪽에서만 발생했다는 점이다. 기분이 좋지 않다. 왼쪽 코와 왼쪽 눈과 왼쪽 귀와 왼쪽 가슴, 오른쪽만 멀쩡했다. 젠장. 몸의 균형이 잡히지 않았다. 입만 징후를 보이지 않았다. 미스터리다. 더 미스터리는 강좌가 끝나자마자 모든 징후는 사라졌다. 병원에 가려고 했는데 증세가 사라져서 가지 못했다. 이것은 꾀병인가, 스트레스인가. 온몸을 휘감던 긴장감은 사라지고 지극한 아쉬움만 남았다.
2.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박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꾀병’ 전문]
3.
나중에 알았다. 그들은 글쓰기를 배우러 온다기보다는 자신이 쓴 글을 뽐내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 가장 밑바닥에는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 ‘순전한 이기심’이 있었다는 것을. 예술가가 아니어도 우리는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다. 매 주 같은 주제를 주어도 각자 써오는 글은 죄다 다르다. 일단 주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에서부터 달라진다. 듣고 싶은 대로, 받아들이고 싶은 대로, 이해하고 싶은 대로 해석한다. 언뜻 성격이 드러난다. 이 다름의 어긋남이 역동을 만들어낸다. 그다음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어떤 이야기로 어떻게 쓸 것인가. 소재를 찾아내고, 이야기를 짜고, 상상을 보태 집을 지어야 한다. 때론 단 하나의 문장으로.
TV 프로그램 ‘댄싱9’에서 김설진&김경민의 춤을 보았다. 흐르는 음악은 거미의 ‘기억상실’. 아, 이것이 표현력의 진수다. 뮤직비디오로 그대로 써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표현력 : 생각이나 느낌 따위를 언어나 몸짓 따위의 형상으로 드러내어 나타내는 능력. (네이버) 표현력 : 사상, 감정 따위를 말이나 행동으로 드러내어 나타내는 능력. (다음)
그들이 춤으로 표현한 몸의 동작 사위 하나하나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어느 찰나에서 멈추어도 그들의 몸은 말하고 있었다. 내 몸은 움직일 수 없었다.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이별한 한 남자의 내면적 갈등’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해내기란 어려울 것 같다. 동시에 이 느낌과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받기도 어려울 것 같다. 소설 한 권을 읽은 것 같다.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다. 안무가의 힘이다. 댄서의 힘이다.
4.
왜 이렇게 표현하고 싶을까. 생각이나 느낌 따위, 사상과 감정 따위를 말이다. 말과 글의 세계에서 말보다 글을 선호했다기보다는 말로 다 하지 못한 말을 글로 표현하고 싶었다. 말에서 구현하지 못한 전달력의 부재는 글쓰기강좌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전달, 어렵다. 표현한다는 것은 전달하고자 하는 욕구가 제반되어 있다. 더불어 공감 받고자 하는 바람도 있다. 내가 표현한 것이 결국 타인에게 가 닿기를 바란다. 하지만 나의 입을 떠난 말이나 나의 손을 떠난 글은 결국 내것이 아니라 타자의 것이다. 고스란히, 건드리지 아니하여 조금도 축이 나거나 변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온전한 상태로 전달되기란 쉽지 않다. 글을 써오고, 써온 글을 자신이 낭독했을 때, 글은 한 번 바뀐다. 낭독의 필터를 거친 글은 이미 집에서 처음 쓴 그 글이 아니다.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낭독의 발견’처럼 낭독이 이런 경험을 불러오게 될 줄은 몰랐다고. 그것은 당사자에게는 당혹감, 부끄러움, 생경함, 색다름, 이국적, 놀라움 등의 감정이었고, 낭독을 듣는 이에게는 타인의 글이 훨씬 더 자신에게로 들어오는 느낌을 받게 했다. 드러내는 자와 받아들이는 자의 위치적 차이를 번갈아가며 느낄 수 있었다. 내가 낭독하고, 네가 듣고, 네가 낭독하고, 내가 듣고, 그리고 우리는 함께 말한다. 당신이 싫다고 말한 글이 우리는 너무 좋아요. 당신이 건조하게 쓴 글이 우리는 아주 끈적끈적하게 느껴져요. 당신이 길을 잃고 쓴 글에서 우리는 당신이 가야할 길이 보여요. 당신이 힘 빼고 쓴 글에서 우리는 당신의 힘이 느껴져요. 전달의 결과는 타자의 것, 공감의 몫은 타자의 것. 그러니 똑바로 말하라가 아니라 똑바로 들어라, 라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듣는 것은 내 맘이니 너는 마음을 비워라, 라고 말해야 하는가. 이것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5.
강좌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소설과 시를 읽고 싶은 갈급한 마음이었다. 읽지 못했던, 읽고 싶었던 책을 편다. 한 줄을 읽는다. 뇌가 책 밖으로 나갔다. 지난 시간을 생각한다. 다시 돌아오면 아까 읽은 그 한 줄이다. 그 다음 한 줄을 읽는다. 눈은 거기 붙들어 놓은 채 다른 생각으로 골똘하다. 어떻게 하면 집중력을 키울 수 있을까. 글쓰기는 훈련이라는 말을 반복한다. 영감 따위 나오지 않으니 매일 매일 써라. 엉덩이를 의자에 붙이고 그 힘으로 써라. 책읽기도 마찬가지다. 자꾸 책 밖으로 나가는 뇌를 붙잡고 읽다보면 한 시간에 50페이지는 읽는다. 글쓰기도, 책읽기도 훈련이다. 무엇보다 내게 집중력을 달라.
2014. 7. 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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