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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 / 김숨 /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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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
댓글 0건 조회 7,599회 작성일 14-07-02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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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여성생활문화공간 비비)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글쓰기강좌는 마지막 수업을 앞두고 있다. 어렸을 적 끝내지 못한 숙제를 해내는 것처럼 스스로에 대한 부채감에서 벗어난 느낌이다. 이날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두려움과 긴장감의 저울이 책, 글쓰기에 대한 애정과 열정의 무게를 짓누르곤 했다. 소중한 건 그 시간들 속에서 분분히 날리던 그네들의 언어와 숨소리들. 7강을 마치고 컴퓨터 앞 널려있던 글쓰기강좌에 관한 책을 모조리 치웠다. 그중에서 5강 ‘묘사하기-설명하지 말고 보여주세요.’에서 같이 읽었던 책 한 권을 남겼다.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김숨의 장편소설이다.
황정은의 『야만적인 앨리스씨』를 읽었을 때 소설을 쓴 작가가 분명하게 진화했다는 놀라움, 반가움, 안도감, 기쁨의 감정은 들었는데, 정작 소설을 읽은 나의 정서는 못 볼 걸 봤다,보고 싶지 않은 것을 봤다, 너도 이 세계를 보렴, 조금만 불편함을 감수하렴, 이 정도는 보아야 하지 않겠니? 세계의 폭력에 비하면 너무 하찮은 것 아니겠니? 나는 하소연했고 작가는 나무랬다. 나는 슬펐고, 스산하고 서늘했다. 추웠다.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소설에 대한 정확한 단어를 찾지 못했고 아무 것도 쓸 수 없었다. 지금이 딱 그 심정이다.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이라니. 
김숨의 첫 소설집 『투견』을 읽었을 때 편혜영의 ‘그로테스크’를 연상했지만 무언가 다르다고만 느꼈다. 박범신의 말을 빌리면 "식물성을 가졌다는 원죄 때문에 마법에 걸린 불구의 인물들이 김숨의 서사를 결정짓는 키워드"라면서 "김숨은 현대사회의 병리학적 야만성에 의해 오늘도 죽임을 당하고 있는 식물성의 비명을 명징하고 예민한 문체로 드러낸다"고 평했다. 그로테스크로 표현되는 식물성의 비명이라. 한강의 식물성을 편혜영의 그로테스크로 표현한다고 말해도 그것이 김숨일 수는 없다. 그럼 그것은 무엇일까. 그는 소설 제목처럼 진화했다는 것만이 내게는 명백한 사실이다.
역시나 계속 이것 외의 다른 것을 말하는 이런 어법은 글쓰기에서는 꽝이다. 
명백한 그것을 말해야 한다. 그가 긴 시간동안 묵묵하게 소설을 써왔듯, 그래서 장편『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과 소설집『국수』를 기점으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듯, 글쓰기가 훈련이듯이 나또한 진화할 수 있을까. 그래, 이제는 정말 소설에 대해 이야기해야겠다.
소설에는 일단 여인들이 나온다. 
진화하는 적들은 조금 있다가. 침이 말라가는 여자(시어머니)와 홈쇼핑 콜센터에서 일회용품처럼 쓰이다 버려진 여자(며느리). 그녀들의 동거는 5년 전, 홈쇼핑 콜센터 전화상담원으로 일하는 며느리를 대신해 아이를 돌보기 위해 시어머니가 며느리의 집으로 들어오면서부터다. 소설의 시점은 그녀(며느리)가 여자라 부르는 시어머니의 침이 마름과 동시에 집안의 물이 마름으로 시작한다. 보잘것없는 여자의 보잘것없는 침이 마르고 늘 나오던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다. 단수의 수난, 그 반나절이 이 소설 시간의 전부이다. 이 시간은 그녀가 여자를 다시 바라보게 되는 시간이다. 
일반적 시선으로 본다면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고부간의 갈등으로 예상할 수 있겠지만, 소설에서 그와 같은 속성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 속성을 지워버린 원인은 돈이다. 전화상담원으로 일하면서 본래의 감정을 상실하고 기업이 요청하는 감정만을 강요받던 며느리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우울과 수치심, 열등감, 자기모멸에서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한 적대적인 감정뿐이다. 이러한 감정은 시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짜증으로 표출된다.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향해 자주 ‘침’ 같다고 말한다. 며느리에게 침은 하등 중요할 것 없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보잘것없고 하찮은 것의 다른 이름이다. ‘뱉어버리는 게’ 바로 침이다. 
현상만으로 보면 주변에 이런 경우가 다반사다. 
아이를 돌봐주기 위해 함께 사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남편은 늘 제 삼자다. 소설에서도 남편은 있지만 거의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역할이 사라진 투명인간. 소설을 함께 읽은 지인은 시어머니에게 이입하며 그녀를 나쁜 년이라고 칭한다. 이상한 것은, 나는 그녀가 그렇게 나쁜 년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독특한 소설 제목을 일컬어, 그럼 여자의 적은 여자란 말인가, 라고 거론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도 식상하다.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무시하고, 시어머니는 화석이 되어 자신을 보호한다. 
화자인 그녀의 시점에서 보면 여자는 대응하지 않지만, 여자는 자기 할 말을 들리지 않게 말한다. 답답해 미쳐버릴 정도로, 자신만의 언어로. 그러나 작가는 여자에게 화자의 입장을 한 번도 주지 않는다. 스스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는다. 이것은 오로지 그녀의 시선에서 비롯된 세계이다. 만약 화자를 그녀가 아닌 여자의 시점에서 시작했다면 소설은 다른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자의 마음을 도통 알 수가 없다. 남편과 시어머니의 대화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그 공간의 가족관계는 온통 불통의 절묘함으로까지 느껴진다. 단수는 그 답답함을 더 배가시킨다. 나오지 않는 물, 말라가는 침, 역할 없는 투명인간, 불통의 관계, 잉여의 인간과 화석이 되어가는 무용, 소설은 매 장마다 종種에 관한 과학적 사실과 더불어 날것의 삶을 이끌어간다. 
그 반나절을 끌어가는 서사는 ‘디테일의 여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놀랍기 그지없는 묘사로 이루어진다. ‘서사와 묘사’를 말할 때 주로 여성작가들은 묘사에 강하고 남성작가들은 서사에 강하다는 이분법적 구분이 있는데, 그 말은 남자는 힘이 세고 여자는 힘이 약하다처럼 우습게 들린다. 남성적 필력으로까지 불리는 정유정이 있는가 하면, 김탁환이 쓴 『리심』과 신경숙의 『리진』, 김탁환의 『나, 황진이』와 전경린의 『황진이』가 남성과 여성이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보여준다. 김탁환이 쓴『불멸의 이순신』과 김훈이 쓴『칼의노래』는 같은 남성작가가 썼지만 ‘이순신’이라는 사람을 어떻게 다르게 그려냈는가를 보여준다.
역시나 이렇게 글이 산만해지면 안 된다. 
주제를 흐리면 안 된다. 길을 잘 찾아가야 한다. 이제 ‘진화하는 적들’에 대해서 이야기할 차례이다. 김소진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이 생각난다. 적은 다 단수가 아니라 복수이다. 적이 아니라 적들. 김소진의 적들은 열린 사회와 대립되는 적들이다. 김숨의 ‘진화하는 적들’은 마치 여인들과 ‘함께’ 진화하는 적들처럼 느껴진다. 나는 다만 여자의 적은 여자가 아니라고만 말하고 싶다. 적들의 정체는 소설을 읽어보고 찾으면 좋을 것 같다.
나는 다시 처음으로 가서 소설의 표지를 본다. 
<IMG align=center src="http://www.yonggamhan.org/liguard_bbs/aribbs/data_file/li_etc_57_20140630-book1-vert.jpg" width=376> 
영국의 화가 겸 시인인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Gabriel Charles Dante Rossetti:1828-1882)가 그린 엘리자베스 시달(Elizabeth Siddal)의 초상화이다. 화가의 부인인 엘리자베스 시달이라는 여인은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벌였던 미술 유파인 '라파엘 전파'(Pre-Raphaelite Brotherhood)의 뮤즈였던 여인이다. 라파엘 전파의 화가 중 한명인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1829-1896)'의 그림 '오필리아(Ophelia)'의 주인공이다. 이 그림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을 소재로 그린 그림인데, 오필리아가 물에 빠져 자살하고 난 후의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글쓰기 수업 5강-묘사하기에서 이 소설의 표지를 10분 동안 프리라이팅으로 묘사했다. 
손이 써지는 대로 자유롭게 글쓰기를 했다. 읽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말했다(나중에 읽었지만^^). 같은 사물을 보고 다른 시선을 만들어내는 과정이었다. 표지에 보이는 여인의 모습이 낱낱이 묘사되었다. 표지 밖의 모습까지 상상하며 그려졌다. 눈, 코, 입이 전해주는 감정과 느낌들, 눈썹, 턱선, 이마, 귀, 머리, 목선, 피부, 옷자락까지 50%는 공통의 감각을, 나머지 50%는 각자의 상상력을 동원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각자의 문체가 느껴졌다. 미리 써오는 과제글보다 훨씬 싱싱한 언어였다.
내가 가장 주목 가는 것은 눈빛이 전하는 시선이다. 
어느 곳도 응시하지 않는 텅 빈 동체, 위가 아니고 정면이 아닌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그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여인의 얼굴은 옆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몸체와 얼굴선이 앞쪽으로 많이 쏠려있다. 그렇다고 앞모습이라고 하기에는 얼굴의 왼쪽 면적이 많이 보이지 않고 왼쪽 귀가 보이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여인은 화가가 바라볼 때 오른쪽 방향으로, 자신의 입장에서는 왼쪽으로 틀어 앉아있었다는 점이다. 
자, 이렇게 나가다가는 끝을 맺을 수 없다. 
글쓰기에서 시작하는 문장과 끝맺는 문장이 얼마나 중요한가. 나는 이 표지 속의 여인이 소설속의 누구인가를 상상해본다. 모습으로 보면 일상에 지친 화자인 그녀일 테고, 진화하기 전의 여자일 수도 있다. 나는 빨리 이 글을 끝내고 싶다. 동이 터온다. 신경숙은 새벽4시부터 아침9시까지 글을 쓴다고 한다. 나는 지금 자고 싶다.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글쓰기에 관한 책이 아닌 문학적 감수성으로 충만한 시와 소설을 아주 천천히 읽고 싶다.
2014. 6. 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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