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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의 산문] 소설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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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
댓글 0건 조회 7,294회 작성일 13-12-31 2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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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여성생활문화공간 비비)
소설을 읽는다. 
에세이를 읽으며 좋은 말, 멋진 말, 아름다운 말에 밑줄을 그었다. 이 말들이 모두 변형되지 않은 채로 사실처럼 느껴졌다. 이것은 허구다, 라고 배운 ‘소설’을 읽으며 밑줄 칠 문장을 찾았지만 쉽지 않았다. 만들어낸 이야기를 끊임없이 쏟아내는 작가를 생각했다. 인물에 쉽게 동화되지 못했다. 밑줄 긋기를 포기하고 소설을 한 권 다 읽었을 때, 그때부터 다시 소설을 생각했다. 그 속에 나온 인물과 그 속에 나온 배경과 그 속에 나온 문장과 그 속에 나온 감정과 그 속에 나온 장면과 그 속에 나온 향기와 그 속에 나온 소리와 그 속에 나온 분위기와 그 속에 나온 수많은 것들에 대해서. 끝까지 왔을 때에야 비로소 하나의 세계가 느껴졌다. 미세하게 빛나는 단선들은 전체가 있어야만 존재했다. 삶의 맥락과 삶의 통찰은 그때 나타난다. 모든 것이 과거형이 되었을 때. 소설이 끝났을 때. 
소설을 읽는다.
허구였던 소설은 어디에나 있는 이야기였다. 만들어낸 이야기, 상상의 이야기, 미래의 이야기는 현재의 삶이 되었다. 그 속에 내가 있고, 그 속에 당신이 있고, 그 속에 우리가 있다. 인물을 읽고, 인물을 만들어낸 작가를 읽고, 그들을 읽고 있는 나를 읽는다. 그래서 소설은 나를 들여다보는 거울이 되었다. 거울 속에 빠지지 않고 싶었다. 다른 작가도 읽고 소설을 읽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들었다. ‘아, 그렇구나!’와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되뇌었다. 잠깐씩 놀라기도 했다. ‘아, 그럴 리가?’ ‘아, 그럴 수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건 내 마음이 아니라 이미 소설에 나와 있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잠깐 상처받았다가 잠깐 위로받았다. 다른 사람들,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 다르게 사는 사람들, 그래도 가끔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도 그래요. 호호호. 
소설을 읽는다.
혼자서도 읽고 함께 읽기도 한다. 아니, 읽는다는 행위는 혼자서 하는 것이니 읽고 난 다음의 행위가 다르다. 떠오르는 것과 느낌을 글로 써볼 수도 있고, 누군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다.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소설을 추천할 수도 있고, 함께 읽은 사람과는 더 많은 감흥을 나눌 수 있다. 소설을 읽으며 타인에게 가고 있다는 것을 체감한다. 소설을 나누며 타인에게 다가가 ‘안녕’ 손을 흔든다. 소설을 들으며 타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린다. 당신은 그렇게 느꼈군요. 당신에게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래요, 지나간 일은 그냥 지나가게 놓아두어요. 아주 많이 희미해져서 사라지려고 할 때 그때 웃으며 인사해요. ‘안녕. 잘 가.’ 
소설을 읽는다.
타인에게 닿지 못할 때도 읽는다. 실체가 있는 타인이 아니라 상상만이 존재하는 세상, 허구여도 상관없다. 거짓이 아닌 세상, 오롯하게 나만이 존재하는 세상, 어떠한 자극도 없는, 어떠한 저항도 없는 미온의 세상, 꿈결 같은 세상, 나와 소설만이 흐르는 세상으로 들어가고 싶다. 외로움이 지나쳐 독毒이 되려고 할 때, 이해받고 싶지 않다거나 이해받지 않아도 된다거나 나만 교감하고 싶은 사치邪侈심이 발동할 때, 그때 소설을 필사한다. 가령 이런 문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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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앨리시어를 본다.
앨리시어가 그녀를 본다. 눈높이가 그녀보다 조금 아래쪽이다. 아직은 그렇다. 그녀의 맥박이 엄지 아래 있다. 손목은 가늘고 차갑고 딱딱하다. 피부, 사람의 피부인데 피부라는 거, 잘 느끼지 못하겠다. 그녀 역시 같은 것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고 앨리시어는 생각한다. 같은 것을 느끼는 거고, 그것은 곧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앨리시어에게 그녀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 아닌 어떤 것, 말하자면 씨발. 그녀에게도 그럴 것이라는 걸 앨리시어는 그때 알아차린다. 그녀에게 앨리시어는 사람이 아니다. 사람 아닌 어떤 것, 말하자면 씨발, 감각하고 반응한다고는 상상할 수 없는 것. 상상하기가 싫은 것. 그녀는 곧 얼굴을 찡그리며 공격해올 것이다. 그때 앨리시어는 생각하게 될 것이다. 지금 내 대가리를 때린 저 손을 꺾어버리면 부러질까. 예컨대 그런 생각을. 알맞게 부러지고 알맞게 아플까. 아프겠지, 다시는 내 몸에 손대고 싶지 않을 정도로 씨발 아플 거다. 그 맛을 보여줄까. 내가 그 맛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지금 보여줄까. 그리고 그렇게 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조만간은, 이제 곧, 역전되는 순간이 말이다. 언제가 될까. 내일?
내일?
내일?
그때가 되면 맛을 보여준다, 라고 앨리시어는 생각한다.
앨리시어가 맛을 보여주겠다.
이길 것이다.
끝날 때까지 그것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
그대는 어디까지 왔나. [황정은 『야만적인 앨리스씨』125-12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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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다.
  <o:p></o:p>
2013. 12. 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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