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시월에 시를 읽지 못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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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봄(여성생활문화공간 비비)
10월을 십월이라 말하지 않고 시월이라 읽는 것은 ‘시’를 읽으라는 의미처럼 들린다. 그러나 시월에 시를 읽지 못하고 흔들리는 갈대 사이로 바람이, 가을이, 시월이 쑥쑥 빠져나갔다. 뭐하느라 그랬을까, 라기 보다는 그래, 그랬구나, 위로하며 시월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빛바랜 사진첩이 아닌 묵은 향이 나는 시집 뒤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96. 5. 20. 化
1. 착륙의 여부를 결정하는 사람들과 이륙의 시기만을 찾고 있는 사람들 속에서
2. 사라진다는 것 부서진다는 것 구멍이 뚫리거나 쭈그러진다는 것
(0652)로 시작하는 전화번호가 적힌 금강문고 딱지가 붙어있다. (0652)도 사라졌고, 금강문고도 사라진 지금, 시집과 그날의 문장만 남았다. 그때로 돌아간다. 해를 곱아보니 마지막으로 다니게 될 직장을 들어가서 1년이 지났을 시점이다. 착륙은 여부를 결정해야 하고, 이륙은 시기를 찾아야 하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사라지고, 부서지고, 구멍이 뚫리고, 쭈그러지는 것의 주어가 생략된 채 서술어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음을 훑고 지나가는 매한가지다.
한국대표시인100인선집 93, 미래사, 3,500원, 1991년 10월 30일 초판인쇄, 지금은 절판된 책, 여러 권의 시집을 엮고 선별해서 출판한 시집, 최승자의 『주변인의 초상』. 제목이 맘에 들었었나, 주변인이 될 줄 예감했나. 그가 첫 시집 『이 時代의 사랑』의 첫 시에서 자신을 예감하듯.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 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 최승자, 『이 時代의 사랑』 ‘일찌기 나는’ 전문
‘매독 같은 가을’이나 ‘개 같은 가을’이라는 구절이 가을이면 종종 그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저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고 시인이 말했지만 이미 그 문장은 서른을 앞두고 있는 이에게나 서른을 지나온 이에게나 할 것 없이 이 시대의 문장이 되어버렸다. 2000년 춘삼월에 구입한 시집은 글자의 인쇄가 수정되어 있거나, 잉크가 뭉개졌는지 글자가 먹이 되어 있기도 하고, 잉크의 농도가 달라서 글자는 희미해보이다가 진해보다가도 하는 것이, 대체 얼마나 찍었기에 이 상황인가 싶어 찾아보니 초판발행/1981년 9월 20일, 26쇄 발행/1999년 6월21일이다. 지금은 판형을 바꿨을라나. 아니 시집을 사는 것이 시인에게 도움이 될까. 문학과지성 시인선16 『이 時代의 사랑』표지에 시인이 직접 쓴 자서가 그 답이 될까.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꾼다. 그럼으로써 시인은 존재한다. 그는 내일의 불확실한 희망보다는 오늘의 확실한 절망을 믿는다. 그리하여 시는 어떤 가난 혹은 빈곤의 상태로부터 출발한다. 없음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없음의 현실을 부정하는 힘 또는 없음에 대한 있음을 꿈꾸는 힘, 그것이 시이다. 그 부정이 아무리 난폭하고 파괴적인 형태를 띤다 할지라도 그것은 동시에 꿈꾸는 건강한 힘이다. 그리하여 가난과, 그 가난이 부정된 상태인 꿈 사이에서 시인은, 상처에 대한 응시의 결과인, 가장 지독한 리얼리즘의 산물인 상상력으로써 시를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로써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밥벌이를 할 수도 없고 이웃을 도울 수도 없고 혁명을 일으킬 수도 없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배우고파 울 때에 같이 운다든가, 다른 사람들이 울지 않을 때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감히 울어 버릴 수 있다는 것뿐이다. 시인이 할 수 있는 소위 가장 건설적인 일은 꿈꾸는 것이 고작이며, 그것도 아픔과 상처를 응시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부정의 거울을 통해 비추이는 꿈일뿐이다.
- 최승자, 『이 時代의 사랑』중에서
시월에 읽지 못한 시를 이제부터 읽는다. 무슨 계절 좋아하세요? 질문에 저는 가을에서 겨울로 가는 그 길목 좋아합니다, 준비해두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대답을 할 기회는 없었고, 곰곰 생각해보니 그때보다는 봄을 좋아한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이 길목은 좋아한다기보다는 취해버릴까 겁나는, 슬퍼질까 두려운, 쓸쓸해질까 외로운, 그래서 당신을 위로할 시가 필요한 때가 아닐까.
2013. 10. 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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