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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을 알게 되는 페미니즘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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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전북여성인권지원센터
댓글 0건 조회 1,769회 작성일 16-10-10 0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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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역 여성 살해사건, 메갈리아 논쟁, 여성혐오, 성소수자 혐오, 남성페미니스의 출현 ....
2016년 한해 페미니즘 이슈가 폭발했다.
그 모든 일들은 맥락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맥락을 알아야 ‘더 나은 맥락’을 만들 수 있기에 ‘맥락을 알게 되는 페미니즘 강좌’를 강좌를 열게 되었다.
지역의 많은 분들이 이러한 현상에 대해 알고 싶고, 페미니즘 강좌에 목말라 하고 있다는 것을 참가신청자 모집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첫 강좌는 2016년 10월 25일에 한 채윤 님의 ‘인간의 성은 어떻게 조작되어 왔는가?’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는데, 참석하신 분들 중에 박슬기 님이 소감을 보내왔다. 그 소감을 공유하고자 한다.

글 ㅣ 편집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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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도 여자도 아닌 사람들이 있다고? 어떻게 ‘정상’적으로 살 수 있겠어. 정말 안됐네. 그래도 요즘은 수술하면 좋아질 수 있는 시대니까, 호르몬제도 계속 투여하고 하면 괜찮다는데....
(명색이 의사라는) 나의 생각과 여느 사람들의 생각 역시 이쯤에서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의학 전공서에도 이들에게 이름 붙인 수많은 ‘신드롬’을 통털어 ‘생식기관의 장애(abnormality)’ 혹은 ‘사춘기 발달의 일탈(aberration)’이라고 적혀 있다. 결국 ‘정상’이 아니라는 의미다. 내가 배워온 의학지식 또한 어떻게 이들을 보다 ‘정상’적인 남성/여성에 가깝도록 ‘치료’할 수 있는가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던 것이 사실이다. 어찌 보면 참 ‘당연한’ 얘기다. 하지만 한 채윤 강사님의 <인간의 성은 어떻게 조작되어 왔는가>라는 강연은 이 ‘당연한’ 얘기가 대체 왜? 누구에게? ‘당연한’ 것인가를 되묻게 했다. 세상에 남성과 여성, 딱 두 개의 성 뿐이라는 전제 자체가, 결국 수 세기 동안 조작되어 온 뿌리 깊은 편견이라는 것이다.
고대에도 이러한 intersex(남성/여성으로 명백하게 분화되지 않은, 흔히 반음반양증 등으로 일컫는)들은 있었다.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이들을 ‘헤르마프로디테’라고 불렀는데, 남성성과 힘의 상징인 ‘헤르메스’와 여성성의 상징인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의 합성어라고 한다. 과연 이름만으로도 강함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신적인 존재가 떠오르면서, 이 ‘특별한’ 존재에 대한 경외심이 샘솟는다. 그런데 2016년 오늘 우리에게 동일한 존재들은 ‘장애’를 가진 ‘이상’하고 ‘비정상’적인 이들이 되었다. ‘비정상’인 이들은 또 있다. 남자가 여자를,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지 않으면 역시 ‘정상’이 아니어서 ‘치료’가 필요하거나 어쩔 수 없는 ‘장애’로서 포용해주어야 한단다. 이 외에도 ‘남성/여성스럽지’ 못해서 낙인찍힌 혐오대상들은 부지기수다. 그놈의 ‘정상’이란 기준은 누가, 왜, 만들어온 것일까.
강연은 그동안 남성/여성의 구분에 있어 우리가 #넘나_당연한_것으로 생각해 온 세 가지 근거 : 염색체, 호르몬, 뇌과학에 대해 조목조목 짚어나갔다. (신기한 것은, 학교 수업시간에는 그렇게도 지겹고 어렵던 내용들이 참 쉽고도 재미있었다는 거다.) 결론은 단 하나. “절대 현혹되지 마라”는 것. 그 무엇도 스스로를 어떤 성으로 생각하는가, 누가 누구를 사랑하는가를 결정할 수 있는 요소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과학이라는 명분으로 각인된 깊은 편견들은 결국 그 사회에서 힘센 자들의 ‘해석’에 따른 것이다. ‘여자의 자궁 속에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할 때조차 그것은 ’과학‘의 이름이었듯이. 그들의 ’해석‘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생후 12개월만 되어도 전형적인 여성과 남성을 구별할 수 있게 된다는 연구처럼, 우리는 이 사회 속에서 남성/여성으로 키워진다. ‘여성스럽다’, ‘남성스럽다’는 표현에 두루뭉술 퉁쳐진 숱한 잣대들을 짚어보면, 결국 그 사회의 작동방식에 대한 확고한 편견을 쉽게 찾아낼 수 있다. ‘여자아이’는 인형을 재우고, 냄비를 갖고 노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듯이, 아이 때부터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각인인 것이다. 강연 내내 이런 의문이 들었다. 왜 사람들은 굳이 그렇게도 고집스럽게 열심히 남성과 여성을 구분지어 내려고 할까. 수 세기에 걸친 남성/여성의 발생에 관한 논쟁과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은 왜 필요했던 걸까-단지 세상에는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개의 성만 존재한다는 결론(이자 전제)을 위해서 말이다. 대체 왜일까. 백인에게 흑인이 필요했듯이, 자본가에게 노동자가 필요했듯이, 이와 같은 이유로 어쩌면 남성에게도 여성이 필요해서가 아니었을까.
1억분의 1의 확률로 난자와 정자가 수정하는 과정을 되짚으며, 우리 하나 하나의 존재가 모두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뚫고 태어난 생명인가(그리고 이 험난한 세상에서 지금껏 생존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얼마나 기적같은 일인가)를 새김질한다. ‘실패’한 생명은 없다. 성이란 남성/여성의 이분법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이들은 ‘비정상’이거나 ‘완전’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만의 것을 갖고 태어나는 것이다. 이 세계에서 유일한 존재로서, 그 존재마다의 수없이 다양한 성이 있을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다는 신념. 바로 그 전제 하나만으로도 근거는 충분하지 않을까. 그러니 내 존재를 남에게 ‘해석’하도록 두지 말아야 한다. 단순한 남녀의 대립각으로서의 페미니즘이 아니라, 불합리한 해석에 대해 계속 아니야,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왜 내가 내 성별을 증명해야 해? 왜 누구에게 내 성을 인정받아야 해? 당신, 왜 나한테 그래? 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어야만 한다. 아. 정말 이번 강연 듣기 잘했다.

글 ㅣ 박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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